남한강변에 살았던, 북인계남인 유학자 `한백겸(한백겸)`
페이지 정보
작성일 22-11-05 10:39
본문
Download : 남한강변에 살았던, 북인계남인 유학자 `한백겸(한백겸)`.hwp
한편, 한 관료 내지 지식인으로서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실학 선구로서의 현실대응方案-즉 토지제도와 수취체제의 개편-을 통해 국가경제를 재건하겠다는 발상을 모색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된다. 원유한, 위의 논문, p.18
이어 호조좌랑˙안악현감˙영월군수˙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선조 40) 평양에 가 현지를 답사하고 「기전체유제설」과 「기전도」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왜군과 내통한 주모자를 죽인 공으로 내자시직장에 특별 임명되었다.
▲ 목 차
1. 들어가며
2. ‘한백겸’의 생애와 학문경향
3. 『구암집』을 통해 본 실학사상
4. 『동국지리지』의 역사(歷史)적 의의
5. [일일답사기] ‘남한강변을 따라서’
6. 나오며
2) 한백겸의 관직생활
1585년(선조 18), 그가 34세 되던 해에 교정청(교정청) 교정낭(교정낭)으로 임명되었다.
한백겸
순서
남한강변에 살았던, 북인계남인 유학자 `한백겸(한백겸)`
레포트/경영경제
Download : 남한강변에 살았던, 북인계남인 유학자 `한백겸(한백겸)`.hwp( 50 )
다. 그리고 1586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스타트하였으나, 1589년(선조 22) 전주 경기전참봉으로 재직 중, 기축옥사(기축옥사) 때 정여립(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이진길)의 시체를 거두어주었다는 죄로 함경도에 유배되었다.한백겸 , 남한강변에 살았던, 북인계남인 유학자 `한백겸(한백겸)`경영경제레포트 ,
,경영경제,레포트
%60_hwp_01.gif)
%60_hwp_02.gif)
%60_hwp_03.gif)
%60_hwp_04.gif)
%60_hwp_05.gif)
%60_hwp_06.gif)
설명
성심성의껏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함경도 유배생활이 한백겸의 개인적 좌절이요 시련이었다 하면, 왜란은 국가와 민족의 시련이요 비극으로서, 그의 人生(인생)관은 물론 국가관 내지 민족의식에 적지 않은 變化를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1614년 『동국지리지』의 저술을 스타트하여 죽기 15일 전에 완성하였다. 박찬승·한영우·조동걸 엮음, 『한국의 역사(歷史)…(To be continued )
성심성의껏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이로써 그는 침략자를 증오하고 무기력한 왕조당국을 비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해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지내고 1610년 서반(서반)직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서울근교인 서호(서호) 수이촌(수이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대 대표적인 예학자로 추천되어 빈전(빈전)에서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으며, 공물의 폐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더구나 1593년(선조 26) 한성부참군으로 난민에게 죽을 끓여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전란의 참상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이 상소의 내용은 이원익에 의해 채택되어 1608년 대동법으로 시행되기도 하였다.